발렌시아판 <스패니쉬 아파트먼트>
“레나, 이 집은 너의 집이야. 그러니까 꼭 다시 발렌시아로 와.”
이주, 교환학생, 여행. 각자의 이유로 집을 떠나 온 동병상련의 자유로운 영혼들이 스페인 ‘발렌시아’에 모였다. 그러나 한 번을 제시간에 나오지 않는 프로 지각러들과의 약속잡기란 매번 순탄치 않다. 어느새 라틴의 시간에 완벽 적응한 시간강박이 있는 저자와 현지인들 사이의 밀당이 웃음을 자아낸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반년의 시간을 담은 기록. 그 안에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한여름의 스페인에서 다양한 국적의 이방인들과 우정을 나누는 가슴 뭉클한 감동과 재미가 펼쳐진다. 저자는 발렌시아의 친구들과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안녕’이라는 작별인사 대신 ‘또 만나자’로 다음을 기약한다. 실제로 그녀는 반년살이를 끝내고 돌아온 뒤에도 발렌시아를 두 번이나 더 방문한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의 현지인이며, 어딘가의 외국인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던가. 가는 곳마다 새로운 인연으로 친구를 만들어가는 저자의 행보는 귀국을 앞두고 유럽 각지를 여행 다닌 여정에서도 이어진다. 스페인에서 3시간 거리의 모로코를 비롯해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맥주축제에 이르기까지. 함께 혹은 나홀로 여행길에서 만난 수많은 배낭족들과 카우치서핑 호스트와의 좌충우돌 에피소드가 기다리고 있다. 매번 쫄리지만, 그럼에도 용기 내서 건넨 말 한마디로 즉석에서 여행메이트가 결성되는 신기하고 소중한 순간들을 담았다. 낯선 타지를 여행 다니는 동안 우연히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크루즈에서 함께 인생 파스타를 맛보고, 유쾌한 밤산책을 거니는가 하면, 헤어질 땐 매번 애정 어린 당부로 서로의 안전한 여행을 기원한다.
이렇듯 저자는 ‘만남에 미리 한계를 짓지 말자’는 자신만의 철학으로 마음이 맞는 사람과 우연히 좋은 여행친구가 되는 설렘과 기쁨에 대해서 들려준다. 국적은 달라도 기꺼이 서로가 서로에게 길 위의 동행자가 되어주는 일련의 에피소드들은 우리가 그간 팬데믹으로 잊고 지낸 타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상기시키며 작은 위로를 건넨다.
온전히 나로서 존재하는 시간
좀 쉬어가면 어때
“인생을 바꿀 변화가 없다 한들 뭐 어떤가. 우리에게는 가슴이 두근대는 일을 하고,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길을 잃을 자유가 있다.”
직장인이 되는 순간, 가족과 친구들과 여행 시간을 맞추는 건 하늘의 별따기이다. 그래서 결국 혼자 떠나기 시작한 여행! 대학시절 동기들과 처음 떠난 유럽 배낭여행이 뉴질랜드 어학연수, 일본 한달살이로 이어지며 지금까지 다닌 나라만 21개국에 이른다. 그렇게 여행을 다니다 스페인이란 나라에 살아보고 싶어졌다.
매일을 낯선 경험으로 채우며 좋은 사람들과의 기억을 잔뜩 안고 돌아온 저자는 여행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얻어야 되냐고 무심히 되묻는다. 자신은 반년살이 후에도 여전히 이전과 변한 게 없는 일상을 살고 있으며, 여행이 꼭 생산적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이다. 하지만 몇 번의 이직과 퇴사를 반복하던 그녀가 반년살이 이후 5년 근속자가 된 것을 보면, 짐작건대 여행이야말로 우리의 반복된 삶을 지속하고 성실히 일상을 버텨낼 마음의 근력을 키우는 원동력이 아닐까.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해외살이. 이 책이 스페인을 좋아하고 어제와 전혀 다른 낯선 일상과 타인의 세계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자들에게 다시금 떠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익숙한 곳을 벗어나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으로 새로운 일상을 꿈꾸는 우리 모두를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으로 데려가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