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0과 1의 무언극 (발행인 / ‘너의 노트’ 저자 이기호)
7년 전 홍대 앞 상상마당갤러리에서 열렸던 독립출판물 기획 전시에서 ‘우연씨와 어쩌다씨의 운명적 만남’을 처음 만났다.
그 해 전시에서 단 한 권, 이 책을 사왔다.
0: 흰 새, 1: 검은 새
0: 날아간다, 1: 날아온다
00: 흰 새가 날아간다. 11: 검은 새가 날아온다.
‘우연씨와 어쩌다씨의 운명적 만남’은 0과 1이라는 두 가지 신호로 전개되는 어느 전깃줄 위의 풍경이다. 책속의 흰 새와 검은 새가 전깃줄 위로 날아왔다가 다시 날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분 남짓이다. 신혜진은 그 짧은 시간 동안 펼쳐지는 풍경을 0과 1로 쪼개서 쪽마다 포개놓는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풍경과 그 앞에서 머뭇거려야 했던 선택들, 그 선택이 불러올 아직은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없는 결말을 외면한 채, 그런대로 행복하다고 부를만한 순간에도 어디선가 움트는 불안, 무엇이 의지였고 성취였는지 나눌 수 없는 그 아날로그의 시간을 타고, 통제할 수 없는 인연이 지금껏 곁을 드나들어 왔다.
나뉘지 않는 시간 속을 나뒹굴던 감정들이, 종잇장을 한 장씩 넘기자 각자 자기 이름을 부르며 얼굴을 든다. 그 시절에 곁에 있던 사람과 주고받았던 그 설렘과 기쁨, 미움과 슬픔, 아쉬움과 미안함이 쪽마다에서 솟아난다. 종이 위를 가로지르는 연필 선을 타고 차분한 디지털의 인식이 흐른다.
책을 덮어 책장에 꽂아놓고 한 해가 지났다. 어느 날 손에 닿아 다시 마지막 장까지 넘겨보고는, 거기에 적힌 작가의 주소로 이메일을 보냈다. 언제라도 개인전을 열거든 가서 보고 싶으니 전시소식을 알리는 단체메일 주소록에 내 메일 주소도 넣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메일을 보내놓고 다시 한 해가 지나서 답장을 받았다. 그녀의 두 번째 개인전 ‘커튼 레이저: 관계의 시작’이 열린다는 소식이었다.
빨간 커튼 까만 커튼 닫힌 커튼 열린 커튼, 전시장에 들어서니 사방이 커튼이다. 책 속에서 두 마리 새였던 것이 전시장에서 두 장의 커튼천이 되어, 다시 0과 1의 무언극을 펼친다.
혼자 전시장을 거닐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커튼 앞에 멈춰 섰다. 그림 속 두 쪽의 검은 천 사이는 엄지손톱만큼 떨어져 있다. 천에게는 서로를 끌어당길 팔이 없어서 이대로 두면 저 둘이 겹쳐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앞에 서 있는 내가 팔을 뻗어 그 둘을 겹쳐주면 모를까.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두 천 조각의 만남과 이별이 애틋해서가 아니다. 커튼 너머의 누군가에게 나를 보이고 싶지 않고 나도 그 너머의 풍경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뜻한 이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만남이 되고 그 둘의 만남이 깊어지는 동안 내 이별도 굳어간다.
커튼 틈으로 그 너머의 풍경이 보인다. 너머에 있는 것 역시 닫힌 커튼이다. 얽히고설킨데다 겹겹이 쌓여있는 관계의 틈바구니를 헤쳐오는 동안 작가가 올라타야 했을 감정의 파고를 넘겨다본다. 그날의 설렘은 우연이었고 지금의 외로움이 내 운명이라고 여겨야 견딜 수 있는 시간이었을, 이별의 굳기를 헤아려본다. 그리고 이제는 굳게 닫힌 커튼과 같은 운명을 젖히고, 다시 찬란한 우연의 풍경을 마주할 수 있기를 응원하며, 오래전 우연히 만난 책을 다시 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