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 – 노트북 모니터 앞에서 오랜 시간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으면 무중력 상태로 우주를 떠도는 것과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P.17 물론 지금의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과거의 나는 들을 수 없다. 우린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에 있고 어떤 것으로도 뚫을 수 없는 강화유리벽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는데 과연 이런 식으로 소통이 가능할까.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긴 시간동안 줄기차게 한 가지만 바라왔던 나의 과거를 읽다 보니 알게 되었다. 대화는 그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제 현재의 내가 대답할 차례다. 일단은 생존신고부터. -나를 읽는 시간 中
P.24 ‘묵묵히’라는 형용사에 어쩌다 애착을 갖게 되었을까. 어째서 나는 ‘묵묵히’라는 형용사로 나의 자부심을 대신하고 있을까.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작가가 되길 바라왔기 때문이겠지. 글이라는 게 묵묵히 쓸 수밖에 없기도 하고. 뛰어난 재능은 없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따라붙는 수식어가 바로 ‘묵묵히’ 아닌가. ‘묵묵히’는 그러니까 이런 뜻이다. ‘어? 너도 여기 있었니?’ -묵묵하다 中
P.40 가끔은 이런 경우도 있다. 이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어떤 이야기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내 문 밖에서 똑똑 노크를 한다. 크고 강렬하고 놀라운 이야기. 문 앞에 서서는 자기를 들여보내달라고 말한다. 써보라고 자극한다. 그런데 나는 쓸 수가 없다. 문 밖에 세워둔 채 망설이고만 있다. 그냥 돌려보내야할 판이다. 저기, 있잖아, 나 말고 훨씬 글 잘 쓰는 아무개가 있는데 그리로 가보지 않을래? 하고 바통을 넘길 수도 없다. 이건 나한테 온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쓰지 않으면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있다. 문을 열어둔 채, 어떻게든 써보고 싶어서 머리를 굴려보지만 역부족이다. 어두운 그림자가 머릿속을 지배하기만 할뿐 어떤 문장으로도 표현이 안 된다. 그런 이야기도 결국 못 쓰게 되는 것이다. -쓰지 못한 글 中
P.101 특별한 일은 없었다. 서로가 하는 이야기라곤 뭔가를 쓰고 있다, 그것뿐이었다. 혼자서 쓰고 있다. 어떤 출판사와 함께 쓰고 있다. 그냥 쓰고 있다. 계속 쓰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나의 상태가 이미 흠뻑 젖어버린 책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쓰는 행위’ 말고는 이야기랄 것도 없는 이 외로운 마임을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와르르 무너져버릴 것 같은 심정이었다. “슬럼프 같은 건 없으세요?” 그녀가 물었을 때 마침내 참았던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나의 동료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