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첫 문장:
회사를 그만두면 적어도 화장실에서 몰래 우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P. 14 이 책은 한강 다리에 관한 책입니다! 이 책은 한강 다리를 건넌 한 사람에 관한 책입니다! 이 책은 한강 다리를 건넌 한 사람의 혼란과 고난 극복기입니다! 아니, 이 책은 인간과 다리의 팬로맨틱 러브 스토리입니다!(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사실은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는 애매하고 모호한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늘 그랬듯이. -시작 中
P. 62 멀리서 스치듯 보기만 했던 붉은 아치형 구조물은 다리 위에 올라서자 거대한 지붕처럼 하늘을 휘감았다. 저 아래로 짙은 초록의 무성한 밤섬이 펼쳐져 있어서 마치 초식 공룡의 등에 올라탄 채 걷는 기분이었다. 내 발로 걸어 들어가는 건지,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 미묘하고도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는 느낌이 좋아서 앞으로도 크고 웅장한 다리 위를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 같다. -서강대교 中
P. 78 모르는 장소에 대한 묘사를 얼마나 내 것처럼 하는지가 그 사람을 바라보는 가장 크고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시선이 된다. 단 한 줄이라도 그런 부분이 있으면 동공이 확장되면서 다른 모든 부분을 흡수하듯 빨아들인다. 그러다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깨닫게 된다. 문장과 이야기가 아닌 사람에게 빠져드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이 사람은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구나. 나는 이 사람을 감당할 수 없구나. 예전이었으면 이 사실을 심각한 고통으로 받아들였을 텐데 이제는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알게 되었다. 자, 나는 이 사랑을 계속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지? -반포대교 中
P. 98 몇 년 전 도서관에서 일할 때 초등학생들에게 우주에 대해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여러분 우주가 어딘지 아세요? 새롭고 신비한 것을 알려주려던 나의 계획은 시작부터 어긋났고 금세 망연해졌다. 무한의 끝이요! 한 아이가 말했고 또 다른 아이가 이어서 말했다. 눈물도 한숨도 없는 곳이요! -천호대교 中
P. 99 가로지른다는 감각에 이끌려 어느새 퀴어 개념에 빠지고 말았지만 나를 더 매혹시킨 건 이것이 언제나 과정 중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언제나 낯설다는 것. 한강 다리를 건넌 얘기, 혹은 한강 다리에 관한 정보를 듣기 위해 이 책을 펼친 사람이 있다면 이쯤에서 크게 실망하며 덮어버릴 것 같지만, 어쩌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괜찮다.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이도 몇 사람 정도는 있을 테니까. 나도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다리를 건너기 전까지는. -천호대교 中
P. 103 한때는 소설에 1인칭 남자 화자를 자주 등장시켰는데 쓰는 동안만이라도 나를 벗어나고 싶어서 선택한 거였지만 나를 벗어나는 일이 왜 남자가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은 남아 있다. 자아의 지평을 넓힌 게 아니라 그저 전통적인 성 구분으로 또 다른 누군가를 대상화했을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한남대교 中
P. 130 그냥 좋은데 어떡해. 자꾸 걷고 싶고. 해가 지지 않거나 내가 지치지만 않는다면 계속 걸을 수 있겠는걸. 집에 돌아오면 다음 날 걸을 생각에 가슴이 막 뛰는 걸 또 어떡해. 꼭 누굴 만나러 가는 거 같애. 그냥 다리를 보는 것뿐인데. 그 다리를 걷는 것뿐인데. -광진교 中
P. 156-157 한강을 다 건넜으니 이젠 무엇을 할까? 다른 지역의 다른 강을 건너볼까? 우리나라에 한강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만약 다른 강을 더 건너게 된다면 이 책의 제목인 『어크로스 더 리버스』의 복수형 rivers가 좀 더 그럴듯해진다. 누가 알겠는가. 조만간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의 강을 한강 건너듯 건너게 될지도. 모르긴 몰라도 건널 수 있는 도시의 강 중에 한강보다 넓은 강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일산대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