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을 이해하는 최적의 지름길
『사이먼 바튼의 스페인사』는 중세 이베리아 전문 역사가인 사이먼 바튼이 쓴 스페인 역사서로서, 일반 독자들에게 스페인의 역사 발전 과정에 관한 개관을 그 기원에서부터 오늘날에까지 명확하고 간결하게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스페인의 역사는 곧 ‘스페인’이라 불리는 하나의 지리적 영역 안에서 수많은 서로 다른 정치체가 공존해 온 역사이다. 이토록 풍부하고 다양한 역사에 대해 명확하고 균형 잡힌 설명을 제공하는 이 책은 곧 스페인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완벽한 출발점이 되어 준다.
‘무척추의 스페인’,
여러 지역들의 끊임없는 갈등으로서 정체화된 국가
하나의 국가로서의 스페인이 언제 생겨났는가는 오랫동안 논란거리가 되어 왔다. 전통적으로 1479년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연합왕국의 페르난도 2세에 의해 굳어진 왕조 간 결합을 그 시작으로 보지만, 역사가들에 따라 6세기 말, 7세기 초 비시고트 왕국에 의해 만들어진 단일 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오히려 1707년에 시작된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이후처럼 근대 시대로 보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베리아반도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지역감정을 이유로, 한 국가로서의 스페인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스페인은 수 세기 동안 정치적 통일을 위해 노력했으나, ‘지리적 핸디캡’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지역주의 또는 분리주의 운동이 발전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강력한 통일국가로 발돋움하는 데에 어려움을 주었다.
이런 이유로 리처드 포드는 스페인을 ‘모래 끈에 의해 하나로 묶인 작은 몸들로 이루어진 다발’이라고 했고,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영향력 있는 에세이 『무척추의 에스파냐』(Espana Invertebrada)에서 스페인은 하나의 국가라기보다는 서로 침투할 수 없는 여러 지역들의 집합체라고 기술했다. 수많은 역사가들에게 스페인 역사는 무엇보다도 중앙부와 주변부 간의 끊임없는 갈등, 즉 지역적 파당주의를 극복하고 진정으로 통일된 국가를 만들려는 중앙 정부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중앙 정부의 영향력을 제한하려는 지역들의 그에 못지않은 끈질긴 노력 간의 투쟁으로 이해되었다. (13쪽)
“스페인이 문제라면 유럽이 답이다”?
스페인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한 균형 잡힌 관점
스페인은 오래전부터 ‘일반적인’ 유럽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나라로 여겨져 왔다. 즉 지리적으로 유럽에 속하지만 지형·기후·생태뿐만 아니라 문화·사고방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의 ‘궤적’에서 많이 다른 나라라는 것이다.
많은 관찰자들에게 스페인의 본질적 ‘다름’은 이베리아반도가 중세 서유럽에서 (시칠리아를 제외하면) 이슬람의 정복을 경험한 유일한 나라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로 인해 8세기부터 무슬림·기독교·유대교 문화의 상호영향 혹은 ‘공생’(symbiosis, 아메리코 카스트로의 표현)이 오랫동안 스페인과 스페인의 정신에 심대한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러나 다른 역사가들은 무슬림들이 기독교 스페인 영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을 강하게 부정하면서, 대신 기독교 국가들이 무슬림의 지배로부터 반도를 수복하기 위해 벌인 레콩키스타(Reconquista, 수 세기에 걸친 재정복 전쟁)가 한 국가로서의 스페인을 만들어 낸 용광로였다고 주장한다. (14~15쪽)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스페인이 문제라면 유럽은 답이다”라고 함으로써 스페인이 다른 유럽 국가들과 보조를 맞추어 안정된 의회민주주의를 발전시키거나 사회, 경제적 개혁을 이루어 내는 데에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처럼 스페인이 유럽에서 얼마나 예외적인지 같은 이분법적 해석 또는 스페인이 얼마나 유럽화되어 있었는지 그 척도를 가늠하는 등의 방식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소개하며 다양한 시각을 제시한다. 현재의 스페인은 ‘스페인의 과거’에만 집착하여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달라져 있으며, 이처럼 역동적이고 개방된 과정으로서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비단 스페인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유럽 국가들에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란 과거와의 끝없는 힘겨루기
오늘날의 스페인은 몰라볼 정도로 산업화되었으며 군 장교들은 더 이상 쿠데타를 도모하지도 않는다. 국민들의 평균 수명이 이전보다 10년 가까이 늘어났으며 여성의 이혼과 낙태가 합법화되었다. 높아진 교육 수준으로 출산율이 하락하는 대신 스페인으로 들어오는 이민자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예술에 대한 국가의 지원과 투자가 크게 증가하여 주요 도시마다 박물관과 극장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스페인의 배우들은 할리우드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물론 높은 실업률, 범죄 증가와 마약 남용, 지역감정 등 아직도 스페인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스페인 내부의 상처와 정치적 분열은 계속해서 공론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역사에서 언제나 되풀이되듯, 그 구성원이 과거의 유산을 통해 배우고 끊임없이 현재를 합의해 나간다면 진정한 치유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지금 우리가 스페인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