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비겁한 자들이 머무는 장소가 아니다.”
가난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집에 있는 단 한 권의 책이었던 아버지의 시집
《또 다른 더 나은 삶》을 읽으며 혼자 글자를 익힌 시인. 오늘날 스페인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시 쓰는 프롤레타리아” 안토니오 가모네다 시선집
“동이 트고 있다/ 당신 상처는 아직도 밤이다// 그러나 낮의 칼이 이미 오고 있다// 빛에 옷 벗지 마라/ 눈을 감으라” 가난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집에 있던 단 한 권의 책인 아버지의 시집 《또 다른 더 나은 삶》을 읽으며 혼자 글자를 익힌 그는 “글자와 시가 한꺼번에 왔다.”고 말한다.
시인이 태어나 첫 생일이 막 지났을 무렵,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마이너 시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스페인어권 시 문학사에서 중요한 시인이자 중남미 ‘모데르니스모’를 창시한 루벤 다리오를 따랐으며, 그 영향이 시에도 나타나 있다. 시인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버지는 부재했지만, 늘 곁에 존재하고 있었다. ‘부재의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시인과 어머니는 고향 오비에도에서 아버지가 죽은 지(1932) 2년 뒤, 레온이라는 변두리로 이주했으며, 이후 그곳에서 평생을 보내게 된다. “레온으로 이사 온 후, 그 당시 집에는 아버지의 시집 《또 다른 더 나은 삶》딱 한 권의 책만 있었다. 혼자 글을 읽는 법을 배워 갔고, 다섯 살 무렵 글자를 알고 책을 읽을 줄 알게 되었는데, 집에 있던 유일한 책이자 아버지의 유일한 시집을 읽었다. 그리고 글과 시가 한꺼번에 내 안으로 왔다.” 평생 천식을 앓고 있던 어머니는 1995년 시인이 음식 시중을 들고 있을 때 휠체어에 앉은 채 세상을 떠났다.
가모네다는 스스로를 “시를 쓰는 프롤레타리아”라고 부른다. 어린 시절의 고통스런 기억과, 전쟁으로 점철된 역사 속에서의 절망,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투쟁이 환상성의 언어로 응축된 안토니오 가모네다의 시편들은 고뇌와 갈등에서 피어난 붉은 꽃과 같다. 상흔이 짙게 깔린 절망의 심연에 핀 고독의 꽃. 그 꽃은 불이고 얼음이다. 심장을 파고드는. 그래서 결국 심장을 차가운 재로 만들어 버리는.
“너는 빛 아래 울며 네 안에 홀로 있네// 네 얼굴에는 상처 입은 꽃잎이 있어// 네 울음소리가// 내 핏줄에 흐르네// 너는// 나의 병이자 나의 구원자”(<세실리아 4> 전문)
“대체 몇 시인가. 우리의 청춘에 어떤 풀이 자라고 있는가.”
언어, 역사, 환경 속에 존재하는 시를 쓰는 현대 스페인 시단 대표 시인.
스페인어권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세르반테스 상 수상 작가
“시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자다. 그래서 시는 소수 지향적이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 시는 창조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그래서 가끔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시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주관적으로 내면의 소통을 추구한다.”
오늘날 스페인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시인이지만 스스로는 ‘지방 시인’, ‘시골 시인’으로 설명되길 원하는 가모네다는 두 살 무렵에 이주해 간 스페인 북부의 레온 지방에서 평생을 살아 왔다.
그의 삶의 전환은 이미 어린 시절에 찾아왔다. 유년의 눈으로 목격한 스페인 내전의 참상, 전쟁 후에도 계속된 억압 상황, 궁핍과 빈곤은 그에게 “나의 정신세계가 그때 다시 태어난” 것 같은 자각을 가져다주었다. 줄곧 변두리 빈민층으로 살아온 그는 생계를 책임지느라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독학으로 중등교육 과정을 마쳤다. 그 후 은행원으로 근무하면서 반독재 운동의 조직원으로 활동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시를 썼다. 첫 시집 《움직이지 않는 반역》은 그에게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안겼다.
유년기의 빈곤, 아버지의 이른 죽음, 홀어머니의 외로운 삶으로 점철된 개인의 이력을 시를 통해 거대한 역사의 장과 결합시킨 가모네다는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펼쳐 보인다. 그의 시에는 죽음과 고통의 기억을 하나의 지표로 삼은 시적 환상성이 농후하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고통의 시대를 산 가모네다의 심미적 지평 안에서 역사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그 전쟁을 직접 겪은 그의 몸은 폭력과 강압의 대상이다.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가모네다는 환상성을 붙잡는다. 그의 몸이 기억하는 과거의 파편과 흔적, 느낌과 환영이 시적 음률을 타고 자유분방하게 흐른다. 그 응축이 처절하다. 그러나 그만큼 아름답다.
창유리 사이에서 비명 소리
사랑의 순간에만 보이는 상처들
대체 몇 시인가
우리의 청춘에 어떤 풀이 자라고 있는가
시인은 말한다 “시는 나의 내면과 나의 주체성을 표현한다. 하지만 내 시는 언어, 역사, 환경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시는 사회적이다. 나는 시에서 자연스럽게 내 삶을 표현한다. 그래서 내 시가 ‘자전적’이라는 얘기도 듣는다. 하지만 그저 숨길 필요 없고, 자연스럽게 내보이는 것일 뿐이다. 시는 하나의 만족스런 자유가 되어야 하고 기쁨의 한 형태일 수 있다. 시인은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고 그래야만 한다. 스스로를 표현해야 한다.”
그는 1988년 스페인 국가 시인 상을 수상하고 2006년 레이나 소피아 상, 전세계 스페인어 권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세르반테스 상을 수상하면서 현대 스페인 시단을 대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