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정유정을 이야기꾼이라고 불렀던 문단 안팎의 말들이 놓친 것은 무엇이며 감춘 것은 무엇일까. 놓친 것은 당연히 정유정의 문학적 가치다. 문단은 정유정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그의 작품을 단순히 스토리텔링이나 ‘기술’의 영역으로만 바라보면서 작품 속의 촘촘한 세계가 늘 환기하고 있던 한국 사회와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유정의 독자라면 당연히 알듯이(또한 정유정 스스로도 밝힌 바 있듯이) ‘자유의지’와 ‘인간 본성’은 정유정의 작품이 늘 정확히 겨냥하던 테마임에도 문단은 여기에 주목하여 작품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_〈문단만 몰랐던 이야기〉 중에서
처음엔 애써 피하려고도 하고, 이유를 모른 채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깨닫는다. 그 지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과거의 사건들을 계속해서 곱씹고 생각해서 가능했던 깨달음이기도 하다. 자신의 작은 행동이 누군가에겐 커다란 영향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은 이들은 비로소 과거엔 하지 못했던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외면하지 말았어야 하는 부름, 미처 하지 못했던 행동이 초래하는 후회를 경험해 본 이들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_〈불안한 인간들의 고군분투〉 중에서
중학교 때는 여름 방학을 맞아 《해리포터》 시리즈를 정주행하기 위해 밤을 새웠고, 고등학교 야자 시간에는 공부를 하다 말고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과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일본 소설을 읽다가 혼이 나기도 했다. 당시의 나에게는 문학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그저 재미있으니 책을 읽을 뿐이었고, 어떻게든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는 것만이 목표였다. (...) 어린 시절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진 ‘한국소설은 별로’라는 편견이 있었지만, 동시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기에 왠지 한국소설을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도 있었던 대학교 1학년 시절이었다. 《7년의 밤》을 읽으며 처음 느낀 것은 ‘한국소설에도 이런 소설이 있구나’라는 것이었다. 《7년의 밤》은 빠르게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_〈장편소설 덕후가 만난 정유정〉 중에서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어떤 선택을 채워가느냐에 따라, 본성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행보는 달라질 것이다. 정유정의 이야기에는 본성의 악에 지배되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이부터 타자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인물까지 다양한 선택과 그로 인한 결말을 맞이하는 인생들이 담겨있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 가보지 못한 길을 간접 경험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다.
정유정은 매 작품에서 독자들에게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져온다. ‘당신이 만들고 싶은 삶은 무엇인가? 그러한 삶을 만들기 위해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 선택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_〈B와 D사이의 C〉 중에서
바로 이 부분에서 정유정 소설을 좋아했던 독자로서 영화가 아쉽게 느껴졌다. 내가 좋아했던 건 단순히 정유정의 줄거리가 아닌, 정유정의 질문과 메시지가 담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정유정은 소설을 쓸 때 파리 한 마리도 그냥 등장해선 안 되고, 등장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작가는 소설을 통해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정유정 소설의 에피소드는 모두 어떤 질문과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복무하는 요소들이다. 따라서 하나만 빠져도 다른 이야기가 된다.
_ 〈영화화의 슬픔과 기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