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너 먹고 싶은 대로..”
좋게 말하면 둥글둥글한 성격의 사회성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지나친 사회화로 개성을 잃어갈 무렵 이제 정말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고민이 되었어. 누군가의 의견에 맞추다 보면 나는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이 타인이 하자는 대로 해서 마음은 참 편하지만 때론 나를 잃어가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시간 약속을 하는 것도, 식사 메뉴를 정하는 것도, 모두 타인에게 맞추다 보니 정작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잊어버리는 것 같아. 어쩌면 이렇게 타인의 감정을 거스르지 않는 스킬이나 태도를 익히는 게 '철이 든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해.
란사로테는 원초적인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장소야. 거칠고 한 없이 투명해서 마치 사람으로 치자면 그 자체만으로 빛을 발하는 사람 같다고 해야 할까? 화산 폭발과 자연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지형은 내가 이제껏 본 것들과 전혀 달랐어. 나는 점점 사회화되고 있는데 이곳은 여전히 자연 그대로 보전되고 있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더라. 덜 발달이 되고, 덜 때가 묻은 사실이 오히려 반갑기도 했어. 태생 그대로의 자연 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볼 수도 있을 테니까.
나는 계속 사회화되고 있는데, 란사로테는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시간의 흐름을 견뎌가는 걸 보니, 여행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질문하게 되더라. 내 본래의 모습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편안한가? 등의 생각을 하게 되었어. 왜 란사로테는 이렇게 본연의 색깔을 잘 지니고 있을까?
많은 자연이 길들여지는 세상에서 란사로테의 자연이 굳건히 보존되는 이유는 섬사람들의 삶의 개척, 회복력, 강인함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어. 섬 곳곳에 위치한 하얀 집, 동굴을 그대로 보존한 채 만든 콘서트장은 자연을 해치기보단 존중한 채 보존하며 몇 천년을 살아왔으니까. 문제가 생길 때마다 문제에 눈치를 보며 자신을 없애는 대신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그 안에서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까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데, 이 상황에서도 하려면 어떻게 할까? 독립 출판을 해보고 싶은데 회사를 다니면서 독립 출판을 해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등의 생각이 떠올랐어.
누군가는 황량한 지형을 보고, 누군가는 황량한 지형을 모두 다 없앨 때 이 섬은 개척하고 아름다움을 찾아내며 순응하는 것을 택했어. 섬사람들의 용기와 삶의 태도, 란사로테라는 자연은 내게 위안을 주었지. 거친 자연환경은 나에게 원래의 색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만들었어. 이 장소는 지금도 끊임없이 도전받고 확장되고 변화하자는 움직임이 있겠지만 가혹한 상황에서도 오랫동안 누적된 회복력으로 본래의 모습을 지켜낼 거라 생각해.
내가 란사로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내가 좋아하는 장소를 보여주면서, 같은 감정을 전달하고 싶어서야. 언젠가 우리가 함께 이곳을 올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지만, 만약 그럴 수 없다고 해도 나는 사진으로, 일기에 적은 글로 조심스레 마음을 전할래.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비록 물리적으로는 함께 가지 않아도 마음 만으로 이 책의 모습들을 전달해보고 싶어.
장소 하나하나를 따라가면서 장소 자체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 어떤 장소를 가도 우린 연결되어 있고, 항상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무엇보다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우리 본연의 모습을 잃지 말자. 우리 자신의 자부심이 되어 당당하고 특별하게 살아가자. 우린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럴만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