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메뎀(지은이)의 말
한국어판에 부치는 말 『세닛』은 제가 처음으로 긴 호흡으로 만든 장편만화입니다. 지금 시점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보자면 (첫 번째 작품이라면 으레 걷게 되는 길이겠지만) 의식하지 못한 채로 수년간은 머릿속에서 발전시켜온 이야기 같아요. 진짜로 손에 잡힌 건, 어느 여름밤 해변에서 나눈 친구들과의 대화에서였죠. 이 이야기는 많은 방식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가진 모든 경우의 수를 긍정하고 싶어요. 어떻든 저로서는, 통제를 벗어나는 것, 대화에 참여하는 이들의 서로에 대한 한정된 이해를 그리고자 했습니다. 선형적인 줄거리를 저자의 입으로 들려드리는 건, 독서를 방해할 뿐이겠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독자로서 발견하는 기쁨을 빼앗고 싶지는 않습니다. 쓰고 그리는 동안, 저는 제가 전달하고 싶은 방향을 상실하는 느낌,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는 데 대한 은근한, 그러나 참을 만한 좌절감을 실시간으로 마주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꿈결 같은 이야기이면서도 스릴러와 같은 작은 긴장과 지속적인 리듬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쪽프레스와 함께한 한국어 에디션 덕분에 무척 행복합니다.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의 디테일에 익숙해져야 마땅하겠지만,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카디스 해변에서 둥싯 떠오른 이야기가 한국땅에서 읽히게 된다니, 놀라운 마음은 진정하기 어렵네요. 한국에 계신 여러분들이, 시간과 공간을 특정하지 않은 이야기 속의 식사와 꿈들을 찬찬히 음미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2021년 6월 마리아 메뎀
역자후기
『세닛(CENIT)』에는 태양이 세닛에 다다를 때마다 만나는 두 친구가 등장합니다. 몽유병을 앓는 두 사람은 태양이 가장 높이 떠 있을 때 만나 지난밤 꾼 꿈, 불안,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두 사람 모두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행동에 불안감을 느끼지만 이들이 몽유병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릅니다. 한 명은 본인의 행동을 부정하고, 다른 한 명은 몽유병 증상을 피하기 위해 잠들지 않으려 노력하는 식이죠.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없는 지난밤의 흔적을 매번 발견하게 됩니다. 꿈과 현실을 오가는 그들의 대화가 조금 난해하게 느껴질 겁니다. 번역가로서도 고심한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잠에서 깼을 때 물건의 위치가 달라져 보인다거나, 손상되어 있다거나, 눈을 떠보니 밤에 잠들었던 곳이 아니라는 판단과 함께 엄습하는 공포감이란, 아주 생경한 남의 일만은 아니지요. 그러고 보면 두 인물의 두려움과 불안을 이해하는 것이 꼭 어려운 일만도 아닙니다. 스페인어를 모르더라도, 작품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세닛'이 알아지셨을지도 모릅니다. '세닛'은(영어로는 zenith) 정점, 최고점, 천장을 뜻하는 스페인어 낱말입니다. 제목의 번역 여부를 두고 고민이 많았는데, 해석의 자유를 열어두는 작품인 만큼 제목을 우리말로 풀어버리기보다는 원문 그대로 두는 게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도입부의 시점, 태양의 위치, 두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의 흐름을 관찰하며 사전을 넘어서는 그 의미를 감지하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