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찰실에 아이는 윗옷을 번쩍 들어 올렸다. 최 선생은 배 위 적당한 부위에 청진기를 가져다 대고, 잠자코 폐나 심장 소리를 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너는 1,483번째 배꼽이란다.”
최 선생이 아이에게 실제로 한 말이다.
이 말이 아동 학대인지 아닌지를 두고 논란은 확산되었다.
44p, '돌무덤의 섬 2'
여인은 돌에 맞아 죽었다
사람보다 돌이 주인인 돌무덤의 섬에서
돌이 태어나 처음으로 옮긴 자리가
여인의 무덤이 되었다
66p, '악마에 관한 오해'
악마는 네가 어린 시절 아껴두었던
금색 크레파스와 라임색 크레파스를 마음껏 쓴다
딱히 좋아하는 색깔도 아닌데
네가 남긴 생선을 화분에 심는다
고등어는 초심자가 기르기 좋고 갈치는 유려하게 떨어지는
곡선이 우아하다 굴비는 향이 오래간다
실은 나였어
네가 식탁 아래로 몰래 건네던
강낭콩과 브로콜리를 받아먹은 존재
초코가 그런 걸 좋아할 리 없잖아
270p, '너의 정원'
축축한 행주로 빈 식탁을 닦는 동안에도 엄마의 얼굴에는 웃음의 잔상이 지우다 만 문신처럼 남아있어. 내가 이미 닦았다고 말해도, 엄마는 무심결에 손을 움직여. 곱씹고 다시 곱씹는 거야. 모양을 접었다가 반대로 편 색종이처럼, 자국이 남아서 자꾸만 그때로 돌아가. 그게 좋은 거야. 구겨진 것처럼 보여도, 행여 선을 따라 반듯하게 찢기더라도, 너를 알기 전의 새 얼굴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 거야.
집에 개라도 한 마리 있었으면 저 딱한 얼굴을 열심히 핥아줬을 텐데.
너는 꾸역꾸역 울고 있다.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데도 우는 얼굴만 하면 우는 줄 안다. “뛸 거야, 말 거야,” 나도 울음이 터질 것 같다.